신용카드를 죽여버렸다. 지갑에 고이 고이 모셔둔 다섯장의 카드를 죽였다. 날카로운 가위 날에 조각지는 카드가 '슥슥' 울음을 운다. 행여 누군가 조각을 들고 퍼즐맞추기를 할세라 여기저기 몇 개의 휴지통에 '주검'을 뿌렸다. 죽여야지 하면서 이것저것 핑계거리로 섣불리 칼 날을 들이대지 못했었다. 핑계의 주는 자동차 주유비와 술. 돈 아쉬운거 모르고 주유소나 술집에 들어가면 현금대신 으레 카드를 꺼내 건넸다. 습관. 그 습관은 정확히 25일 후에 엄청난 후회와 압박으로 돌아왔다. 명세서에 뚜렷이 활자화된 '결제 예정 금액'이 낄낄대며 자신을 비웃더라. 어찌어찌해 결제를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몇 개의 핑계거리를 더 들고 나와 카드를 긁었다. 제길. 일상같은 반복이었다. 그래서 이 무지막지한 놈들을 한 데 모아놓고 눈 한 번 찡긋할 틈도 없이 집단 학살을 해 버린 것이다.
돈을 많이 벌거나 떵떵대며 살고 싶지는 않다. 카드를 죽여버린들 180도 생활패턴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. 조금 늘씬해진 카드지갑을 모시고 다닐테고 월 말이면 돈이 궁해 똑같이 헉헉될 것이다. 그러나 나는 카드란 녀석을 믿고 싶지 않다. 술을 먹으면 왜 그리 대범해지는지. 지갑에서 킥킥대는 녀석들이 자신을 꺼내라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때 나는 늘상 들리지 않는 연설에 감복하고 마는 것이다. 어제만 해도 그랬다. 오랜만에 반가운 디자이너 후배 녀석을 만난 것 까지는 좋았다. 꼼장어에 해물탕에 쐬주병(작가 김소진의 표현대로 소주는 쐬주다)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하더니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거다. 노래나 한 곡 멋지게 불러 재끼자는 녀석의 제안을 덥썩 받아들인게 화근이었다. 주변을 둘러 봐도 어디 한 곳 마땅한 노래방이 없는 거였다. 노래장, 노래광장, 노래마을 등 이상한 간판만 즐비한데 네온사인이 화려한 걸 보면 이른바 '노래주점'일 터였다. 순수한 마음에 노래만 부르고 나오려 하는데 술은 기본이라며 부산 사투리의 종업원이 자꾸 술을 나른다. 그래 모, 한 병 정도야... 했는데 금액이 엄청 나온거다. 장가를 가고 애가 둘이나 딸린 후배 녀석의 지갑사장을 뻔히 아는지라 낼름 카드 한 장을 꺼내 계산을 해버렸다. 후배는 너무 비싸게 나왔다며 자기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. 좋은 기분에 마셨으니 됐다고 하고 녀석을 달래 돌려세웠다.
오늘 아침 무거운 머리를 감싸고 일어났는데 기상 시각을 훌쩍 넘긴 거였다. 20분 늦을 것 같다고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 회사로 향하는데 카드 지갑에서 자꾸 카드들이 큭큭 대더라. 나를 긁어줘서 고마워.. 가 아니라 '어제도 나의 명석한 연설에 넘어간거지?'라며 조롱하는 투였다.
널 죽인다, 다짐이 선다. 나쁜 녀석들. 그래서 죽여버렸다. 이제 나의 지갑엔 검소한 체크카드에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법인카드 한 장 뿐이다. 됐다 그만하면. 당장은 불편하겠지만 죽여서 내가 살 수 있느니 된 거다.
신용카드,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.
덧>
아차차..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신용카드 한 장이 더 있는 거다. 바로 회사 사원증 겸 출입증 카드. 제길. 마그네틱을 긁어버려서 결제만 안되게 해야겠군. 너는 영영 불구로 살아라.